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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15 (28)

페이지 정보

해피정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3-04-14 10:28 조회3,325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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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08 (02:19) from 66.26.40.211' of 66.26.40.211' Article Number : 76
유일한 (ilhan@hitel.net) Access : 2552 , Lines : 105
<어느날 갑자기> 독서실 (28)
<제 허락 없이 이 글을 다른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저작권법 위반입니다.>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우연이었는지 은철이 칼로 내려치는 순간, 은혜는 와락 은철의 품에
안기면서 여기서 자기를 빨리 꺼내달라고 다시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은혜의 모습을 보니 가슴마저 아파왔다. 은혜는 떨쳐내려는 은철에게 계속
해서 매달리면서 계속해서 울먹거렸다.
은철도 갑작스런 은혜의 행동에 좀 당황한 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철의 표
정이 다시 표독스럽게 바뀌더니 안겨있던 은혜를 앞으로 밀쳐 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칼을 높
이 치켜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번에는 은혜가 그 칼을 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별로 놀라
지 않는 표정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하던
애 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지 않고, 오히려 침착하고 어떻게 보
면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철도 은혜의 그런 변화를 느꼈는지, 칼을 쳐들었다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했다.
“이제 달관한 모양이지. 죽기 전에 알려주지. 나는 너의 친 오빠가 아니고, 여기 있는 시체들은 다
내가 난도질 한 거야. 그리고 지금은 네 차례고..."
나는 은혜가 그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기절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예상
한 사람처럼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침착한 표정으로 은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에서
뭔가를 꺼내며 아주 침착한 어조로 얘기했다.
“내가 말했지. 이상한 주사를 맞으면 움직일 수 없어도 얘기는 다 들을 수 있다고... 그리고 얘기
중에 예전에 오빠가 했던 일이 기억났어. 그날 오빠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밤새운다며 준비할 때
오빠는 여기저기서 이상한 부적들을 모았잖아. 그 중에 내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었어. 핏빛처
럼 아주 빨간 줄에 매달려 있는 빨간 가죽 같은 거. 오빠는 그것이 돼지 심장 말린 거라고 했어. 물
론 지금은 그것도 믿지 않고 있지만.
여하튼 그 날 이후, 오빠는 모두 쓸모 없다고 부적같은 거 전부 버렸지만, 그 돼지 심장 목걸이는
보지 못했어. 오늘 여기 오빠가 매고 있는 것을 볼 때까지.
자 이거 맞지? 이거 없으면 오빠도 어떻게 되는 줄 알지?”
그리고는 손에 든 엄지손가락 크기만한 빨간 덩어리를 목걸이에서 때어서 입으로 꿀걱 삼켰다. 너
무 의외의 일이었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은철과 주인은 은혜가 하는 일을 그냥 보고만 있었
다. 은혜가 그것을 삼킨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은철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 팽
개치며 괴성을 지르며 은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은혜가 그 붉은 덩어리를 삼킨
후였다.
은철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얼굴로 은혜의 입을 벌리고, 얼굴을 무참히 후려갈겼다. 그 때 내가 은
철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은철의 광기보다는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두려움과 공포였다. 은철은 극도
의 두려움을 느끼며 은혜를 공격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리 은혜를 때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은철은 독서실 주인을 보고 소리쳤다.
“저기 땅에 떨어진 칼 가져와!!!”
독서실 주인 역시 뭔가 두려운 듯이 황급히 칼을 집어 은철에게 주었다. 나는 이 때다라는 생각에
독서실 주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은철이 미쳐 날뛸때 여차하면 독서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권총
을 뺏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철의 다음 행동을 보고, 나 역시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은철은 칼을 받아 들고, 은혜의 배를 갈라서 그 붉은 덩어리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은혜의 필사적
인 저항으로 제대로 칼을 찌르지 못하고, 팔과 어깨에 상처만 내고 있었다.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
다. 아무리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그냥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죽는다는 생각으로 은철
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은혜의 바동거림이 방해가 되었는지, 은철은 독서실 주인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씨발! 보고만 있지 말고, 이 개년 빨리 잡고 있어!!! 시간이 늦기 전에 위를 갈라서 그것을 찾아내
야 돼!!! ”
그렇게 황급하게 소리치던 은철이 독서실 주인 뒤에서 뭔가를 봤는지 겁에 질린 소리를 질렀다.
“저거 뭐야!! 씨팔! 벌써 나왔단 말야! 안돼!!”
나는 은철이 보고 놀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태우려고 쌓아 놓았던 5구의 시체가 있었
다. 처음에는 무얼 보고 겁에 질렸는지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시체에서 뭔가 희미한 것이 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연기인 것 같기도 한 것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은철은 그걸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은혜를 팽개치
고 피 묻은 칼을 든 채, 그 시체 쪽으로 향했다. 나는 처음에 그가 공포에 질려서 그 시체를 다시
한번 난도질 할 생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오산이었다.
은철은 시체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에 서 있던 독서실 주인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는 대뜸 칼로 주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악!!! 무슨 짓이야!!”
주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은철을 밀쳐냈다. 주인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
작했다. 주인은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떨어트리고 뒤로 넘어졌다. 은철은 자기 군복에 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누운 채로 뒷걸음질치던 주인에게 다가가서 그의 목을 뒤졌다. 그제서야 나는
은철이가 왜 주인을 공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주인 역시 그 붉은 덩어리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은철은 피를 흘리며 버둥거리는 주인에
게서 그 붉은 덩어리를 빼앗아 자기 목에 걸었다. 시체 근처에서 피어나던 기운은 이제 완연한 사
람 모습, 즉 그 시체의 모습이 되었다.
그것들은 곧장 은철과 독서실 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것들의 무표정하지만 끔찍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나 역시 소름이 쫙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 졌다. 그것들은 천천히 하지만 똑바로 독
서실 주인쪽을 향해 갔다. 독서실 주인은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막으며 누은 채
로 뒷걸음질 쳤지만, 피 때문에 미끄러운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정말 지옥을 들여다
본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은철은 이제 좀 냉정을 찾은 모양으로 누운채로 발악을 하고 있는 독서실 주인을 보고 냉소적으
로 한마디 했다.
“너도 알았잖아? 우리가 영원히 같이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
보다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할 거야... 잘 가. 그 동안 재미있었다고...”
독서실 주인은 은철을 보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했지만, 시체에서 나온 그것들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은철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너희들도 잘 봐! 죽기 바로직전에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보는 것도 흔하지 않는 일이나까...”
그때였다. 피를 흘리며 거의 죽어가던 독서실 주인이 괴성을 지르며 발악하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
나 다시 은철을 덮쳤다. 너무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은철도 땅 바닥에 넘어졌다.
주인은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 그 붉은 덩어리를 찾으려고 했고, 은철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 나는 은혜 쪽으로 접근했다. 다행히 은혜는 상처는 여러 군데 났지
만,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얼이 빠진 사람처럼 내 말에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것이었다. 너
무 무서운 상황에서 의외의 용기를 부리다가 두려움과 충격에 잠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박
형사 쪽을 돌아보니, 박 형사 역시 아직 몸을 뒤척이는 것 보니 살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갑자기 “다다다” 소리가 나더니, 은철이 가지고 있는 총에서 총알이 나가기 시작했다. 둘이 필사적
으로 싸우다가 은철의 총이 발사된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총일아 내 귓 옆을 지
나가는 듯한 경험을 또 한번 하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다 보니, 둘이 서로를 죽이려고 씨름하는 바
로 옆에 박 형사의 권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 짚고 싶었지만,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
아올 줄 몰라 접근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쪽을 쳐다보다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그것들과 눈
이 맞추치니 등골이 오싹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중에 누구 한 놈이 이기게 된다
면 우리 역시 죽음 목숨이다 라는 생각에 천천히 권총 쪽으로 다가갔다.
한 두어 발자국 쯤 전진했을 무렵, 다시 ‘다다다’ 하고 귀청을 뚫어놓은 것 같은 총소리가 울렸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 맞은 걸로 끝나지 않았다. 총알이 쌓아놓은 독서
실 의자 쇠다리를 맞고 불똥이 티더니, 기름을 뿌린 곳에 옮겨 붙어 순식간이 방안이 불길로 가득
찼다.
그 둘은 불길이 거세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했다. 그들이 굴러서 바로 내 앞까
지 왔다. 시체에서 나온 그것들 역시 자기 시체들이 불에 타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두 사람
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옆구리 상처가 무리였는지, 주인이 헐떡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은철이 총 개머리판으로 주인의 얼
굴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총으로 쓰러져 있는 주인을 겨누었다.
“개새끼, 결국 이렇게 될걸. 불까지 내고 지랄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여기서 은철이가 주인을 죽이게 되면, 우리 역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
설일 겨를도 없이, 주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은철이 뒤로 달려들어 목에 걸려 있는 붉은 덩어
리를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발로 그의 등을 그것들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내 발길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은철은 넘어지지 않고 금방 내 쪽으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 붉은 덩어리를 내게 빼앗긴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소리쳤다.
“이 새끼! 너마저 죽음을 자초하는 구나!! 죽어라 씨팔놈아!!!”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가슴에 총알이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대비했다. 이렇게 죽는 구
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일이 나지도 않고, 오히려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
렸다.
“아악!!! 악!! 이거 놔!! 제발!!!”
눈을 떠 보니,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은철의 팔 다리에는 그것들이 달라붙어 입으로 은철의 살점을 뜯어내고 먹어치우고 있다. 은철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것들을 때어놓으려고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휘져었지만, 소용없었
다. 아이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은철의 팔 다리를 마치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먹듯이 먹음직스
럽게 먹어치우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은철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더욱 끔찍한 것은 불속에 들어가서도 그 원귀들은 은철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팔을 먹어치우고
있던 악령들이 은철의 팔을 불길 밖에서 잡아당기고 있고, 다리를 잡은 것들은 불길 쪽에서 잡아
당기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들 장난 하듯이 은철이 몸을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덕분
에 은철은 상반신을 멀쩡한 채로 하반신이 타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은철은 정말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멍하는 은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은혜를 일으켰다. 아무런 대답없이 멍하니
있는 은혜의 뺨을 몇 번 때리고, 소리쳤다.
“은혜야!!! 정신 차리라니까!! 은혜야!!”
소용없었다. 불길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쓰러져 있는 박형사는 곧 불길에 휩싸일 것 같았다. 나
는 은혜의 손을 잡아챈 채로 박 형사에게 다가갔다. 온 몸이 쑤시고 통증을 느꼈지만, 있는 힘을
다해 피투성이 박 형사를 어깨에 들쳐매었다. 다리가 휘청하고 중심을 잡기 어려웠지만, 여기서
포기 할 수 없었다.
나는 한쪽 어깨에 박 형사를 들쳐맨채, 반대쪽 손으로는 멍하니 서 있는 은혜를 잡고 출입구 쪽으
로 뛰어갔다. 불길이 사방에 붙어서 그 열기에 숨도 쉬기 힘들었지만, 간신히 출입구 쪽에 도달했
다.
그 긴박한 상황에 내가 왜 뒤를 돌아봤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었는지, 살인마
들에 대한 증오심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목격했던 불가사이 했던 현상들의 마지막 확인이었는
지...
여하튼 나는 박형사를 맨 체로 힘겹게 출입구를 빠져나와, 고개를 돌려 그 방안을 보았다. 방안은
한 마디로 불지옥이었다. 쌓아놓은 독서실 책상과 의자들은 맹렬하게 타고 있었고, 벽까지 불길
이 활활 타고 있었다.
은철은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었는지, 목까지 불길에 휩싸인 채로 몸부림을 치며 처절한 비명을 지
르고 있었다. 아직도 옆구리에 피를 흘리고 있던 독서실 주인은 간신히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뭔가 살길을 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
는 다르게 은철을 괴롭히던 그 아이들이 이제 주인쪽으로 하나 둘씩 다가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출입구 옆에 쌓아져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불길과 함께 무너지면서 출입구를 막았다. 하지만, 마
지막 순간 그 주인이 우리를 돌아보았고, 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절망이나 이전에
보였던 두려움의 눈빛이 아닌 뭔가 광기와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0.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
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 자신감에 찬 눈빛이었다.
불길이 독서실 전체로 번질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그 방 출입구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독서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워낙 다급했고 위기 상황이었는지 70키로가 넘는다는 박 형사가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여기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독서실 건물을 빠져나왔고, 건물 앞 공터에 쓰러지듯 박 형사를 내려놓았다. 은혜는 아직
도 멍한 상태였다. 나는 심장을 터질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길이 치솟고 있는 독서실
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독서실 봉고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
니, 독서실 봉고에 실었던 시체들이 불길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 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불길은 독서실 전체로 번졌다. 아니, 불길이 생명이 있는지 그 참혹한 기억이 있는 독서실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복잡한 심정으로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박 형사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힘겨우나마 말문을 열었다.
“우리... 살아난 건가요?”
“휴우... 예 살아나긴 살아났아요...”
“경찰에 연락했나요?”
“아직요... 좀 견딜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저기 내려가서 구급차부터 부르죠..”
“필요없어... 아직 버틸 만 하고... 이 불을 보고 곧 소방차가 오겠지... 그 때도 늦지 않아요...”
박 형사는 몸의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신음소리를 내었다. 내게 몸을 좀 일으
켜 독서실에서 불나는 것 좀 보게 해달라고 했다. 불을 보면서 박 형사는 자기 직업 정신을 잊지
않았는지, 자기가 기절하는 바람에 알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 내게 물어봤다. 박 형사 상처도 심했
지만, 워낙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 저 방에서 일어났던 거의 모든 사건을 기억했다. 사건에 전말
에 대해 모두 얘기하고 나자 박 형사가 부탁을 하나 했다.
“깜빡 잊었는데, 소방차를 기다리기 보다는 당장 여기 전화 좀 해 주쇼. 전화해서 아무런 얘기하
지 않고, 은혜를 찾았고 독서실로 당장 오라고 얘기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한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피곤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워낙 진지한 부탁이라 한 100미터 떨어진
구멍가게 앞에 공중전화로 갔다. 알려준 대로 전화를 했더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수화
기 저편에 들려왔다. 나는 박 형사 시킨 대로 아무 말도 안하고, 그 말만 전했다. 상대편은 내 얘기
를 듣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는 ‘죄송합니다’라는 한 마디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독서실 쪽으로 올라가는데 박 형사가 손가락으로 불길에 쌓인 독서실을 가르켰
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가르킨 쪽을 올려다 봤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나는 또 한번 c충격
에 휩싸였다.
그것이 보인 것은 총무실 부근 창문이었다. 바로 독서실 주인이 아직도 죽지 않고 총무실 부근 창
문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불길이 강해 제대로 보지 못 했지만, 그는 잠시 창문너머로 우리들
을 노려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도 이내 사라지고 불길은 더욱 세졌다.
나는 황급히 박 형사에게 달려갔다. 박 형사는 자신도 바로 직전에 봤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 주인
이 다시 보이나 하고 창문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한참을 쳐다봐도 역시 활활 타오르는 불길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박 형사가 뭔가를 봤는지 내 팔을 꽉 잡는 것이었다.
나도 그것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불길이 타오르는 창가에는 그 독서실에서 시
체로 발견되었던 아이들과 서경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렬로 늘어서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었
다. 너무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지만, 시선을 땔 수 없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니까 가슴 속까지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왠일인지 그들의 슬픔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꽃도 피어보
지 못하고 참혹하게 희생된 영혼들...
어느 순간 그들은 창문에 사라지고, 불길만 보였다.
우리는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참을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싸이렌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문득 이 거대한 사건의 중심에 서서 현실과 직면한다는 것에 겁이 났다. 잘못 하
면 미친 놈 취급 받을 테고, 잘 해봤자 미친 살인을 목격한 사람으로 알려져 평생 괴로움에 떨면
서 살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결정해야 했다.
마음을 굳히고, 나는 박 형사에게 얘기를 했다.
“박 형사님. 말도 안 되는 줄은 잘 알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요...
저를 이번 사건의 관계자에서 빼주실 수 있는지... 하나 뿐인 목격자 은혜 역시 아직 정신을 못 차
리고 있으니, 제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박 형사님 뿐이에요.
범인들도 다 죽고, 박 형사님도 처음부터 다 알고 계시니까, 제 증언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요. 재판도 없을테고... 제가 왜 이러는 지는 박 형사님도 아실 것입니다. 제발 부탁이예요. 더 이
상 이런 악몽과 연관돼서 살기 싫어요...“
박 형사는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의 은인이고, 내가 범인이라고 실수한 사람인데 그 정도도 못 들어줄까요...
일한씨가 얘기를 안 해도, 제가 먼저 제의할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알겠지만, 이번 사건은 그냥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 거 예요.
아마 신문에도 한 줄 나지 않을 걸요...
그러니 신경 너무 쓰지 마세요...“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거라니... 나는 박 형사의 대답을 듣고 기뻤지만, 많은 의문이 생겼다. 하지
만, 싸이렌 소리가 다가오고 있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은혜에게 다가갔다. 은혜는 아까 은철이 산채로 위를 갈아내려고 했을때부
터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얼이 빠진 멍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은혜의 손을 꼭 잡고 얘기했다.
“은혜야, 네가 꼭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얘기한다.
넌 정말 용감하고 착한 아이였어. 너 덕분에 나와 박형사님이 살아날 수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
희생될지도 모를 많은 생명을 구했고... 너는 잘 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니 주변에 일어난 일은
제발 잊어버려라.
그 일 잊어버리고, 우리 한번 다시 만나자... 그럼...“
은혜는 마치 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멍한 표정으로 돌아갔
다. 이제 싸이렌 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리고, 불빛이 저 너머에서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독서실을 올려다봤다. 이제 어느 정도 불길이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절뚝거리면서, 큰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뭔가가 잡혔다. 바로, 은철에
게서 뺏은 그 붉은 덩어리였다. 괜히 불길해 보였다. 이런 걸 은혜가 삼켰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분
이 나빴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그것을 박 형사에게 던져 주었다.
“아마 이 사건의 불타거나 훼손되지 않은 하나뿐인 물질적 증거 같네요...
잘 쓰세요...“
“일한씨, 이 사건으로부터 물질적으로는 해방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해방되는 것은
일한씨 몫이예요. 나중에 술 한잔 합시다...”
박 형사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다가 상처가 도지는지 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나 역시 손을 흔들어
주고 발길을 제촉했다.
얼마 안 가 싸이렌 소리를 내면서 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차들
이 소방차가 아닌, 검은 차들이었다. 이것이 박 형사가 말한 평범하지 않은 사건의 마무리구나라
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간신히 큰 길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차창으로는 희미하게 뜨는 태양이 보였다. 택시 운전
사는 나를 태워다주고 해장국으로 아침 먹을 것이라며 계속해서 내게는 의미 없는 얘기를 지껄였
다. 나는 백미러를 통해, 독서실 쪽에서 나오는 연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때지 못했다....



<계속>
* 뒷 이야기
- 자 드디어 끝이 보입니다.
그동안 보잘 것 없는 글 너그럽게 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일 <독서실>의 마지막 편이 올라갑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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