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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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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폰] 1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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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1-01-30 23:10 조회3,3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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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폰] 1. The Phone 프롤로그

2010.10.06 22:54

1. The Phone

이런 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한다면 정말 더러운 내 운명이다. 너무도 평범한 어느 날, 그리고 지극히 보통사람인 내 앞에 나타난 그것 하나로 인해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이후 보름달이 꼭 열 번 모습을 나타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와 내 주변에 벌어졌던 일들을 더 늦기 전에 기록하려 한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그런 사실을 이렇게라도 고백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다. 어쩌면 죽어버려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다고 그 일들이 없던 일이 되지 않을뿐더러 비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난 죽을 수가 없다. 나로 인해 시작된 그 뒤엉킨 인연을 풀어야 한다. 뒤틀려진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 모든 일들은 바로 ‘그 핸드폰’ 하나로 시작되었다.

[더폰] 2. 핸드폰인가

2010.10.06 22:57

2. 핸드폰인가

역시 일기예보는 믿을 게 못된다. 분명 비가 온다고 했던 토요일인데 어느새 커튼 사이로 치밀고 들어오는 햇살이 눈두덩을 간질이는 덕분에 원하지 않는 기상을 하고야 말았다.

‘토요일.... 또 주말이군.’ 영수는 새벽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깔깔해진 입맛을 다시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허리를 비틀어 보니 드드득 하는 관절 뒤틀리는 소리가 창문을 때리며 방 안에 메아리 친다. ‘에이, 씨... 비라도 올 것이지...’ 영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영수야, 일어났으면 밥 먹어. 식탁에 차려 놨으니 먹고 있어. 관리사무소 간다, 아들~”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마치 협곡에 불어 닥치는 회오리 바람소리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집고 쏟아져 들어온다.

“알았어. 엄마.” 영수는 문틈을 향해 입을 내밀며 방금 들었던 목소리와 최대한 같은 크기와 톤으로 대꾸한다. 주말마다 같은 대화가 엄마와 나 사이에 오고 가고 있다.

엄마는 아파트 동대표다. 원래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늘 조용히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시는 성격의 엄마였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엄마는 변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기웃거리더니 급기야 동대표를 덜컥 맡아서는 참 열성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동대표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엄마는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관리사무소에 출근을 해서 이런저런 참견을 한 후 같은 건물에 있는 체력단련실에서 오전 내내 운동을 한다. 남편 없이 씩씩하게 사는 법을 하나씩 학습하고 있는 거다. 고등학교 1학년인 내 동생 태희가 독서실에서 돌아올 즈음 엄마는 바람처럼 들어와 점심밥을 차려 준다. 우리집의 주말 오전 풍경이다.

거실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 나온 영수는 하품을 하며 힐끔 동생 방을 쳐다본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다. 영수는 여전히 눈은 반쯤 감은 채 식탁 의자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다. ‘달그락 달그락’ 밥그릇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텅 빈 집에 울려 퍼진다. ‘휴...’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쳇, 주말에 이게 뭐야.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데이트 할 여자 하나 없고 말야. 한심하다 도영수!”

아버지가 계셨을 때는 직장 때문에 도심 한 복판에 살았었다. 그러나 1년 전, 혼자 남게 된 엄마는 서둘러 아파트를 팔고는 야트막한 뒷산 근처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실 시내에 사는 게 훨씬 좋았지만 엄마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1년 정도 살아보니 나름대로 괜찮다. 무엇보다도 주말마다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뒷산이 있다는 게 좋다. 하나 더 좋은 점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다.

오늘도 변함없이 핸드폰을 챙겨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산을 향했다. 엄마는 체력단련실 러닝머신 위에 있고 동생은 독서실에 있으며 나는 지금 산에 있다. 우리 세 식구의 각자 사는 방식이다.

‘흠... 오늘은 왠지 샛길로 가보실까나?’ 평소에 거의 다니지 않는 길로 오른발을 내딛었다. 그쪽 길에 드리워진 그늘이 오늘따라 한결 시원해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였다. 마침 그 방향에는 등산객도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응? 뭐...뭐야 이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핸드폰을 켜자 나타난 것은 심하게 왜곡된 화면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비 온 뒤 움푹 파인 도로에 고인 물 위에 무지개색 빛을 반사하며 기름띠가 어지러운 곡선을 그려내고 있는 것만 같다. 수신 감도를 나타내는 안테나 선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는 두어 바퀴 휘감긴 꽈배기처럼 꼬여 있었다.

‘에이, 씨... 스마트폰으로 갈아 탈 때가 됐다는 거지, 응?’ 영수는 어떻게든 수신 감도를 높혀 보려 핸드폰을 든 손을 하늘로 뻗어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아무 반응은 없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얼핏 비치는 반짝거림 하나 있다. 서너 발자국 앞 작은 풀무더기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어라? 핸드폰이네.... 잉? 핸드폰인가?” 영수는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처음엔 핸드폰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더 보니 아닌 것도 같다. 장난감이라고 하기엔 디자인이나 상태가 너무도 정교했지만 그렇다고 핸드폰이라고 보기엔 그야말로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가득 찰 정도의 크기다. 전면에 커다란 스크린이 있으니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의 액정이라 봐주면 될 것도 같다. 뒤집어 보니 중간 정도에 50원짜리 동전 크기의 빨간 단추 모양이 도드라져 있다. 안테나로 보이는 게 옆모서리에 부착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전체적으로 무질서하지만 치밀하게 아귀가 들어맞게 짜인 퍼즐과도 같은 선들이 가득하다. 마치 조각들이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갓 태어난 고양이의 까만 눈망울처럼 표면은 반질반질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신기한 것은 키패드에 숫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 대신 마치 고대 그리스어 같은 모양의 기호가 새겨진 5개의 모양이 연결되어 있었다.

[더폰] 3. 예쁜 그녀

2010.10.08 14:50

3. 예쁜 그녀

핸드폰이 아닌 것 같지만 아무래도 핸드폰 같은 그 물건을 영수는 한참 만지작거리며 관찰을 했다. 하긴, 요즘 핸드폰이 워낙 다양하고 디자인이 수시로 바뀌니까, 이것도 새로 나온 핸드폰이겠지 뭐, 하고 영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 주인을 찾아줘야 할텐데...

영수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그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5개의 고대 그리스어 같은 문양 중 첫 번째 블록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지잉~’

엄지 손톱 크기의 블록은 손가락으로 눌려지기 직전에 이미 가벼운 터치음이 나며 밝게 빛이 났다. 굉장히 민감한 터치 패널인가 하고 영수는 생각했다. 이윽고 전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크린에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츠츠츠’

‘응? 여자?’

보통은 저장되어 있던 최근 통화 내역이 나타나거나 단축키라면 어떤 번호로 전화가 걸리는 게 흔히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다짜고짜 영상이 뜨며 왠 여자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스크린 속의 그 여자는 지금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슴골 정도까지 늘어진 생머리의 미..인..이었다. 가슴이 깊게 파인 노란색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으며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애인인 듯...

영수는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왜 갑자기 이 여자가 화면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이 순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쏙 드는 이상형의 미녀가 지금 화면에 떠 있고 그녀는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있고 나는 지금 그녀를 이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예쁘다...’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두 눈은 맑고 깊었으며 콧날은 그리 낮지도 높지도 않게 얼굴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으며 귓불은 강낭콩 절반 크기 정도다. 입술은 약간 야윈 듯 했지만 건강한 색상을 머금고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탐스러울 정도다. 물론 얼굴은 브이 라인이다. 하나만 더 추가한다면 무척 볼륨감 있는 가슴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번개처럼 용모의 이런저런 특징들을 파악한 영수는 이런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에 땀이 흥건히 배는 듯한 느낌이다. 영수는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바꿔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영수는 뭔가 이상한 점을 간파했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핸드폰이 옮겨지는 순간 화면 속의 그녀의 모습 또한 각도를 달리하는 게 아닌가. 분명 조금 전까지 그녀의 왼쪽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이제 나타나는 모습은 오른쪽에서 보이는 장면인거다.

‘어? 뭐야 이건... 여자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단지 이 핸드폰의 위치가 바뀐 것뿐인데...!’

영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런 이 현상에 대해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화면이 분명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 핸드폰의 각도에 따라 화면에 나타나는 이 여자의 보이는 부분이 달라졌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영수는 한 번 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혹시?’

[더폰] 4. 훔쳐보기

2010.10.09 18:58

4. 훔쳐보기

‘스윽’

영수는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 셀카를 찍을 때처럼 팔을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은 각도로 하여 죽 폈다. 그러자 스크린에 나타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대박’! 영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 가득 나타난 것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그녀 머리 위쪽에 몰래카메라가 있어 그 영상을 지금 이 핸드폰으로 전송받아 생중계로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상황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누군가와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다. 영수는 조금 더 확인을 해보기로 한다. 핸드폰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주의 깊게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여가며 그럴 때마다 다른 각도로 나타나는 화면 속 그녀의 모습을 음미하고 있다. 깊이 파인 블라우스의 가슴골과 귓볼에서 시작하여 쇄골까지 떨어지는 깔끔한 라인, 그리고 미니스커트를 벗어나 미끈하게 뻗은 허벅지의 부드러움을 마치 은밀히 잠복근무를 하며 감시 대상을 살펴보듯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수는 지금 갑자기 화면에 나타난 그녀를 훔쳐보고 있는 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지금 이 순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수 밖에 없다. 영수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볼 수 있을까... 혹은 봉긋한 가슴을 조금이라도 더 훔쳐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가득할 뿐이다.

‘에잇, 밑져야 본전이지 뭐.’

영수는 볼이 살짝 발그레 해지며 방금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핸드폰을 점점 아래로 내리더니 급기야 아예 땅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살짝 위쪽으로 각도를 틀어보는데...

‘오옷~’

영수는 갑자기 오금이 저렸다. 화면에 나타난 영상은 바로 그녀의 아슬아슬한 다리와 미니스커트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팬티 라인이 아닌가! 역시 그랬다. 영수의 어렴풋한 기대와 예상은 적중했다. 지금 이 핸드폰은 왠지는 모르지만 화면 속 그녀를 훔쳐보는 기능을 하고 있는 거다. 핸드폰을 그녀의 다리 높이보다 아래로 내리면 그 위치에서의 장면이 나타나고 있는 거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영수는 지금 감질나게 보이는 팬티 라인이 못내 아쉬운 거다. 그의 두 뺨은 조금 전보다 더 발그스름하다. 연애는 커녕 여자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어 본 경험이 없는 순진한 총각이, 지금 이상형의 여자를 훔쳐보고 있는 상황은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선물?

영수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자신도 모르게, 마치 주문이라도 걸듯 간절한 염원을 담아 핸드폰에 비친 그녀를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저...저기요. 다리를 조금만 벌려 주시면 안될까요?”

[더폰] 5. 사라진 시간

2010.10.10 15:47

5. 사라진 시간

'스윽'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영수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스크린 속의 그녀는 모으고 있던 다리를 살짝 바깥쪽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영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무도 없는 등산로 옆 샛길에 혼자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살폈다. 다행히도 여전히 주변엔 아무도 없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고요 그 자체였다. 영수는 잠시 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그것’에 대한 ‘감상’을 마음껏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

영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점점 가슴이 두근거리며 몸의 어느 한 부분으로 뜨거운 혈액이 몰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스물한 살 청년의 신체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반응했다. 영수는 핸드폰 화면 속의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정지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통화를 끝내고 종료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는가 싶더니...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영수가 들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이 꺼졌다.

“츠팟”

“어...?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러지?”

영수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지만 까만 화면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좀 전의 므훗한 장면을 몽실몽실 떠올리며 다시한번 아까 눌렀던 첫 번째 문양의 블록을 지그시 눌러봤지만 이번엔 아무 반응이 없다.

“그쪽에서 전화를 끊으면 몰래카메라 기능도 꺼지는 건가?”

영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전까지 마치 전자기파 폭풍이라도 맞은 듯 심하게 왜곡되어 알아볼 수 없었던 액정 화면 속 정보들이 이젠 정상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0시 10분이다. ‘열시 십분?!’ 영수는 왼손의 자기 핸드폰과 오른손의 ‘이상한’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편두통이 몰려왔다. 목덜미에서 시작하여 뒤통수의 반 뼘 정도 부위가 화끈거리며 귀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 듯 했다. 고3때 시작된 편두통은 이젠 습관성이 된 것만 같다. 특히, 무언가를 너무 집중해서 생각하거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접했을 때 어김없이 찾아온다.

주말이면 엄마는 항상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절대 시간을 바꾸는 경우는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늘 아침밥을 차려놓고는 내가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일단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엄마 덕분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거의 같은 시각에 눈을 뜨고야 만다. 엄마가 집을 나서는 시간은 항상 10시다. 나도 오늘 그 시각에 일어났다. 거기까지는 또렷한 기억이다.

늑장을 피우며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밥을 대충 먹고 옷을 걸치고 산에 들어서서 지금 이 곳까지 걸어 올라왔으므로 내가 축지법을 쓰지 않은 이상 적어도 30분은 족히 지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대략 10시 30분 정도가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핸드폰 액정에 찍혀 있는 숫자는 10시 10분이다.

[더폰] 6. 바이오 펜

2010.10.11 00:35

6. 바이오 펜

편두통이 가라앉지 않는다. 영수는 계속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분명 핸드폰에 찍혀 있는 시간은 ‘열시 십분’. 아침에 눈을 뜬 시간은 10시. 지금 서 있는 곳은 등산로 옆 샛길. 이상하게 생긴 핸드폰을 주웠고 뭔가를 누르자 어떤 여자가 스크린에 등장했다. 왠지 ‘등장’이란 표현을 쓰고 싶다. 마치 나를 위해, 나에게만 보여주기 위해 잠시나마 짜릿한 순간을 맛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5분 정도 그녀를 훔쳐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훔쳐봤다는 걸 그녀는 알까? 아....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대체 10분 동안 그 많은 일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을까?

영수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에휴... 잠이 덜 깼나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지?” 영수는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기지개를 크게 켠 후 핸드폰들을 양쪽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터벅터벅 집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등산객이 없다는 게 평소와 다른 점이었지만 영수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여자 생각과 편두통에 따른 약간의 짜증이 절반씩 들어차 있었다.

‘연예인 뺨치게 예뻤는데...’ 영수는 산을 내려가며 연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까지 편두통을 유발시켰던 그 ‘시간차’에 대해서는 이제 별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단지 어떡하면 다시 그녀를 훔쳐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있는 그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 온 영수는 침대에 몸을 던지며 벌렁 누워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얀 벽지에 갑자기 아까 봤던 그 여자가 방긋 웃으며 나타난다. 다리를 슬쩍 벌렸을 때 번개 같은 눈썰미로 보고야 말았던 그녀의 팬티 색깔이 하얀 천정 벽지 모서리를 툭툭 건든다. 그러더니 어느새 흰색 가장자리를 시작으로 슬금슬금 먹고 있다. 결국 천정은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여진다. 다리를 배배 꼬고 있던 영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뭔가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정색을 하며 침대에 앉은 영수는 주머니에서 아까의 그 핸드폰을 꺼냈다. 아주 신중하게 첫 번째 문양의 블록을 가볍게 터치하고는 뭔가를 기대하며 스크린을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 반응이 없다.

‘쳇, 뭐야 이거... 재미난 걸 주웠나 했더니...’

영수는 실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응? 이게 뭐지? 안테나? 모양은 간지나는데 촌스럽게 웬 안테나?” 영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쪽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뭉툭하게 살짝 튀어 나온 부분을 손톱으로 집어 힘을 주니 뭔가 쑤욱 뽑혀 나왔다. 무심코 안테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핸드폰 길이만큼 잡아 당겼을 때 당연히 그 정도에서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뽑혀져 나온다. 마치 거미 꽁무니에서 슬슬 기어 나오는 거미줄 같은 투명한 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엄지와 검지 손톱 사이에 끼어 딸려 나오고 있는 그것은 안테나라고 보기엔 그 형상도 느낌도 너무나 낯설었다. 더구나 손가락에 전해지는 감촉은 플라스틱도 금속도 아닌 약간의 따스함도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느낌의 그 무엇이었다.

“! !” 영수는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뭔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는 순간 어느새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그것은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펜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미줄처럼 투명했던 그 선은 마치 오로라의 영롱한 빛처럼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핸드폰의 스크린은 밝게 빛나며 푸르스름한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스스스스’

[더폰] 7. 감촉이 없다

2010.10.17 19:24

7. 감촉이 없다

텅 빈 화면이 나지막하며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그저 안테나로 생각하며 뽑았는데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쓸 것’으로 변해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다.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고 가는 선이 하늘하늘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그 쓸 것의 꽁무니와 핸드폰의 옆구리를 무심히 연결하고 있다. 영수는 그 선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려 보았다. 아무런 감촉은 없다.

‘감촉이 없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분명 감촉이 없다. 물리적으로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현상을 접하며 영수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비록 가늘긴 하지만 엄연히 눈에 보이기 때문에 형태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질량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게 상식적으로 맞다. 하지만 그 선을 건드렸을 때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건 아무리 양보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영수는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본다. 역시 마찬가지다. 검지는 그 선을 태연히 통과하며 허공을 가를 뿐이다.

“어?” 영수는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다시 편두통이 시작되려는지 뒷골에 혈액이 급속도로 몰리면서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 눈앞에서 코를 베이는 느낌이랄까? 믿기지 않지만 분명히 벌어진 현상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영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뭔가 이상한 날이려니 잠깐 생각했다. 아직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아서이겠거니 했다. 애써 이런저런 것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든 영수는 핸드폰 액정에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접근시켰다. 그 끝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펜 비슷한 게 쥐어져 있다. 약간 온기가 느껴지는 게 영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슬쩍 외면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뭔가를 적어본다.

‘도영수’

교과서 글씨체로 반듯하게 써진 자기 이름을 보고는 조금 전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살짝 가라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블릿PC 화면에 펜으로 입력하는 방식과 다를 게 없었다. 글자는 부드럽고 깔끔하게 써졌다. 거기까지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찰나에 불과했다. 도영수라는 글자가 화면에 적힘과 거의 동시에 주머니에서 영수 핸드폰의 컬러링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더폰] 8. 버추얼 몰래카메라

2010.10.20 22:19

8. 버추얼 몰래카메라

영수는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늘 그랬듯 발신자 확인을 위해 액정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모르는 번호도 아는 사람 이름도 아니었다. 마치 고대 희랍어 같은 꼬불꼬불한 문자 하나가 덜렁 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글자 윤곽을 따라 오밀조밀한 빛이 은근히 퍼져 나오고 있는 모양이 여간 분위기 있는 게 아니다.

“응? 뭐야, 이거...”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영수는 퍼뜩 어떤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이다. ‘어디서 봤더라...’ 영수는 이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아침 산에서 주은 이상한 핸드폰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었던 것! 아주 잠깐 동안 망설였다. 컬러링은 계속 울어대는데 왠지 찜찜한 기분 또한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수는 통화 버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세게 꾸욱 눌렀다. 잠시 후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러나 적막. 조용한 방 안에 자신의 호흡 소리만 규칙적으로 파동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잘못 걸려온 전화였겠거니 생각했다. 영수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 무심히 쳐다보았다. 별 생각없이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영수가 갑자기 오싹함을 느끼며 동공이 있는대로 확장된 것은! 여전히 그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괴핸드폰의 스크린이 밝게 빛나며 나타난 이미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영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왼손에 괴핸드폰, 오른손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몹시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 표정이 적나라하게 괴핸드폰 화면에 떠 있었다. 몹시 기분 나쁜 상황이다. 이런 장면 역시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랬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그 상황과 똑같다.

몰래카메라 현상이다. 영수는 황급히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뭔가를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둘러본다. 텅 빈 공간 뿐 질량과 형태를 갖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몰래카메라가 아니라 가상의 몰래카메라다.

영수는 심호흡을 하며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그의 두 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다. 역시 예상대로다. 괴핸드폰이 올라갈수록 그 화면에 비춰지는 영상 또한 각도를 달리하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자신이 아침에 그 미소녀를 훔쳐 볼 때와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다.

‘탁!’

영수는 엄지에 힘을 주며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힘껏 잡아 당겼다. 통화 종료. 그와 동시에 괴핸드폰에 떠 있던 자신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굉장히 놀랍기도 했지만 왠지 허전했다. 대체 이게 뭘까...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그저 신기했지만 다시 곰곰 생각할수록 이 핸드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방금 전 벌어졌던 일과 아침에 산에서의 일이 뭔가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여자는 대체 누굴까? 이 핸드폰의 주인인가? 그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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