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인조가 1달만 버텨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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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20-03-17 15:47 조회390회 댓글0건본문
청은 군대를 일으키긴 했지만 식량난&경제위기로 군량 자체가 없었음
일단 정묘호란(1627년) 발발 시점에 청은 명의 무역봉쇄로 경제적으로 완전히 붕괴 직전이었음.
링크: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이때 나라 안에 대기근이 들어 쌀 한말의 가격이 은 8냥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는데 나라 안에 은과 돈이 비록 많았으나 무역하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은은 천하였고 여러 물건은 가격이 올랐는데
좋은 말 한 마리가 은 300냥, 소 한 마리는 은 100냥이었고, 망단 한 필은 은 150냥, 무명 한 필은 은 9냥이었다.
도적이 잇달아 일어났고 소와 말을 훔치거나 혹은 행인을 위협하고 죽이니...
[출처]정묘년 후금 대기근 관련 사서 번역 (【부흥】네이버 ㅇ1역10념 뒤인사 카페) |이 상태에서 조선을 삥 뜯고 따갚돼로 살아보겠다는게 정묘호란의 진상
이 상태에서 조선을 삥 뜯고 따갚돼로 살아보겠다는게 정묘호란의 진상.
청은 나라 상태를 봐도 알겠지만 국가에서 군량을 제공 못하고, 팔기군으로 소집되는 병력에게 알아서 식량 마련해오라고 지시하는 상태. 근데 병자호란 때 총동원 내리면서 개개인한테 마련하라는 식량이 겨우...
1. 팔기군(여진+내번 몽고족)+한족군
-명령하달일 : 1636년 11월 19일
-휴대군량 : 15일치
-집결일 : 11월 29일 심양성 밖
-집결 병력 : 약 21580명(기병 약 7300명)
2. 외번 몽고족
-명령하달일 : 1636년 11월 11일
-휴대군량 : 20일치
-집결일 : 11월 30일 심양성 밖
-집결병력 : 약 12000명
출처: 1달만 제대로 버텼다면 청군은 헬조선을 맛보았을 것!
조경일록(朝京日錄) 1637년 윤4월18일 기사中
비가 옴. 고 태감이 도로 관상(關上)으로 갔다. 이곳에 와서 들으니,
“2월 20일쯤에 태감과 군문이 조 총병(祖摠兵)과 함께 관외(關外)의 철기(鐵騎) 6, 7만 명을 거느리고
삼차하(三叉河)를 건너갔다가, 오랑캐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퇴각하여 3월 10일쯤에 진(鎭)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이는 대개 조대수(祖大壽)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몰래
‘오랑캐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쳐들어갔으니 지금이 바로 빈틈을 타서 들이치기에 좋은 때이다.’
라고 통보하였으므로, 조 총병이 단단히 마음먹고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겁을 내어 논의가 일치되지 않은 탓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요약
1. 청나라는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경제파탄나서 오늘 내일하던 상황이었음
2. 평균 15~20일 정도의 식량만 휴대한 상태로 따갚되를 노리고 겨우 겨우 조선 침공
3. 당연히 그 틈을 타서 명나라 7만 대군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요동으로 빈집털이하러옴
4. 쌀 창고를 남한산성 밖에 만들고 런도 제대로 못한 능양이의 병신같은 플레이로 청군의 조기 승전
5. 결국 명나라 7만 대군도 회군해버림
출처 : 대역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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