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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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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용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1-11-14 01:34 조회942회 댓글0건

본문

금속공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 연금술이 뭐에요?"

재미있는 질문이며 금속과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내 구미에 당기는 글들만 몇개 모아놨다. 연금술에 대한 지식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해리포터를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조만간 봐야지...) 주술, 마법, 연금술 등등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나름대로 재미있는 주제인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꿈을...어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주니 말이다.

1. 연금술의 정의 중의 하나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체계화되어 중세(中世) 유럽에 퍼진 주술적(呪術的) 성격을 띤 일종의 자연학

2. 간단한 역사

비금속 (卑金屬)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거의 같은 무렵 중국에서는 도교(道敎)에서 나와, 복용에 의하여 사람이 장수하고 신선(神仙)으로 화할 수 있는 ‘단(丹)’, 즉 금의 제출(製出:鍊丹)을 추구하는 주술과 사상이 있어서 과학사상 서양의 연금술과 대비하여 중국연금술이라고 한다. 서양연금술은 E.L.홀름야드에 의하면 금속전환을 실현하여 사람에게 불로장수를 부여하는 힘(아마도 중국의 영향)을 가진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 즉 다른 이름 ‘엘릭시르(elixir)’ 또는 ‘팅크제(tincture)’의 제출을 추구하는 실천적 ·현교적(顯敎的) 연금술과, 물질적인 금속전환을 단순한 비유로 하고 기도와 귀의(歸依)에 의해 죄 있는 인간을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신앙의 한 방식이 된 신비적 ·비교적( 敎的) 연금술이 있다.

심리학자 C.G.융은 연금술의 표현형식이 된 심벌리즘(symbolism)에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에 호소하는 것이 있고, 이것이 신비적 연금술을 성립시켰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고, 실천적 연금술에도 신비적 성격이 따르고 있었다. 어원적으로 알케미는 아랍어 ,키미아 alkimia가 유럽어화(語化)한 것으로, 그 정관사 al을 제외한 어근 kimia는 한 설에 따르면 ‘흑토(黑土)의 나라’, 즉 이집트를 뜻하는 이집트어 캠 khem에서 유래하며, 금속의 용융 ·주조를 뜻하는 그리스어 키마 khyma에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3. 연금술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에밀레, 에밀레'라고 울리는 에밀레 종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운 종소리와 함께 슬픈 설화가 생각나 더욱 신비감을 준다. 철의 성분과 제련에 대한 근대적인 방법을 몰랐을 때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정성(?, 또는 잔인함?)을 보이면서까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설화는 모두 소위 연금술의 이야기들이다.

연금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물, 불, 공기, 흙 등 4원소가 만물의 근원으로서, 제1원질(第一原質)이라고 보았다. 사물은 이 네 원소의 섞인 비율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진다.
어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용기를 동물의 자궁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특별한 고통,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했다고 한다. 즉, 모든 동물이 태어날 때, 산고의 고통이 따르듯 고통이 수반되어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합리주의자의 대표격인 데카르트도 젊었을 때 연금술에 심취한 적이 있었으며, 근대 역학의 체계를 세운 뉴턴이 말년에는 연금술에 탐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금술의 열망과 그 끝없는 추구는 대략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나타나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으며, 중국에서는 유학과 불교의 중흥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걸었다. 뉴턴 자신도 연금술을 탐닉했으나 뉴턴의 과학이 파급되면서 연금술의 열정은 식어 갔고 이에 대한 비판은 강화되었다. 연금술은 라부아지에의 근대적인 화학에 의해서 대체되었고, 이에 따라 화학에서의 연금술적인 전통은 점차로 쇠퇴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우스운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연금술은, 혹은 연금술에 대한 열정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연금술이 과학사에서 한 역할을 비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밭 어딘가에 금을 묻어 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 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연금술사는 지금도 마술사로, 첨단 과학자로, 외계인으로 무궁무진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영원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
연금술에 관한 에피소드 3가지

아득한 옛날부터 땅속에 묻혀 있는 금이나 은은 그보다 천한 금속이 몇 천년에 걸쳐서 점점 '성장'했다는 신앙이 있었다. 대개의 연금술사들은 수은이나 납과 같은 비금속을 금이나 은으로 변화시켜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일부 연금술사는 불로장수의 약을 찾아내려고 애썼는데 이것은 마시기만 하면 모든 질병이 낫고 긴 수명이 보장된다는 만능의 약이었다. 실제에 있어 거의 모든 연금술사가 취한 방법은 비금속에 섞으면 금이 되는 어떤 특별한 물질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 특별한 것은 '철학자의 돌' 또는 '현자의 돌'이라고 이름지어졌고 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변성(變成)'이라고 불렀다.

1) 에드워드 3세와 라이문두스 룰루스

1329년에 영국을 다스리는 국왕은 에드워드 3세(Edward Ⅲ:1312-1377)였는데, 당시 대개의 전제군주가 그렇듯이 이 국왕도 금에 굶주려 있었는데, 불가사의하다고 할 만큼 손쉽게 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유명한 연금술사를 찾아내라고 명하였다.

한편, 라이문두스 룰루스(Raimundus Lullus:1235-1315)는 스페인 귀족으로서, 프란치스꼬회의 수도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 그는 '철학자의 돌'-즉 '콩알 만한 크기의 귀중한 한 첩의 약'을 가지고 수은에 사용하여 광산에서 캐내는 금보다 더욱 순수한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연금술사로서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지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많은 나라들을 방문했다고 알려졌는데, 영국에 머무는 동안 철, 수은, 납에서 600만 파운드의 값어치가 있는 금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 금의 일부는 속칭 "라몬금화"라 불린 금화를 만드는 데 쓰였다고 한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 싸움을 벌였을 때 룰루스는 변장을 하고 영국에서 도망쳤는데, 룰루스가 살고 있던 방안에는 그 위에 오래도록까지 금가루가 남아 있었고 전해진다.

2) 의사 헬베티우스와 화가 엘리어스

1666년 12월 화가 엘리어스라고 자칭하는 낯선 사나이가 존 프레데릭 헬베티우스를 찾아왔다. 헬베티우스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궁정 전속 의사로, 뒷날 명예혁명으로 영국왕 윌리엄 3세(William Ⅲ:1650-1702)가 된 오란주 공(Prince of Orange) 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엘리어스는 호주머니에서 상아로 만들어진 상자를 꺼내 놓았는데, 그 속에는 유황의 빛깔이고 호두알 크기의 유리와 같은 물질 세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자의 돌'이라고 말하였다. 엘리우스는 헬베티우스에게 이 조각의 하나를 손에 쥐고 살펴보라고 권하면서 커다란 황금판 5장을 보이고 자신의 '철학자의 돌'을 사용해서 얻은 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였고, 다시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몇 주가 지난 후 엘리어스는 다시 돌아와 헬베티우스에게 작은 '철학자의 돌'을 건네주면서 "왕후들조차 본 일이 없는 훌륭한 보석을 드리지요"라고 말하였다. 엘리어스는 헬베티우스에게 "이 돌을 황색의 납으로 싸서 녹은 납속에 넣으시오. 황색의 납은 돌을 납의 증기로부터 보호하고 결국 그것은 녹은 금속 속에 충분히 스며들 것이오"라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 되돌아갔으나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헬베티우스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실험을 하였다. 그는 납을 도가니 속에 넣고 녹였고, 아내는 그 동안에 귀중한 돌을 백랍으로 쌌다. 납이 녹자 백랍으로 싼 그 돌을 그 속에 넣었고 15분쯤 지나자 납 전체가 금으로 변하였다. 헬베티우스는 오란주 공을 비롯한 그의 신하들로부터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며, 그 자신은 실제로 납을 금으로 바꾸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헬베티우스와 화가 엘리어스에 의해 만들어진 금에 관한 기록은 이밖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믿어지지 않고 있다.

3) 루덴돌프와 타우젠트

화학에 대한 지식이 눈부시게 발전한 20세기에 들어와서조차 비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1925년 프란츠 타우젠트라는 독일인은 비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공표하였다. 그는 '변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떤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폭발사고가 나서 부산물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경위를 밝혔다. 그는 땅속에서 자연적으로 극히 느린 속도로 비금속이 성장하여 금이 된다는 고대인의 신앙을 믿고 있었다. 자연에서 몇 십 만년이나 걸리는 일을 자신은 서너 시간동안에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타운젠트는 이 놀라운 뉴스를 가지고 뮌헨의 조폐국 전문가들에게 접근하였으나 모두가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최고위층 장군의 하나이며 후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한 루덴돌프(Erich Ludendorff:1865-1937)와 접촉하는데 성공하였다. 루덴돌프는 타우젠트의 주장을 조사하기로 뜻을 굳히고 자신의 의붓 아들에게 그 조사를 담당케 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의붓 아들은 타우젠트의 주장을 조사하는 동안 그가 실제로 '변성'의 비밀을 발견한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는 엄중한 감시아래 실시된 40회 또는 50회에 걸쳐 실험에 입회하였고, 대개의 실험에서 타우젠트는 핀 머리만큼 되는 금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의붓 아들은 타우젠트가 금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는 자신에게 보여 주었으나 최종단계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나, 타우젠트가 없는 동안에 실시된 몇 번의 실험에서도 극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것 같으며 1927년에는 사기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확언하였다.

한 동안 루덴돌프 장군도 지극히 회의적이어서 몇 번이고 실험을 되풀이하도록 요구하곤 했는데 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는 타우젠트가 예로부터의 오랜 비밀을 발견한 것으로 믿게 되어 자신의 법정 대리인에게 타우젠트의 방법을 개발하기 위한 회사를 설립케 하였다.

1928년이 되자 타우젠트는 '타우젠트 남작'일고 자칭하면서 궁전 같은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고 회사의 거대한 자본을 믿고 거들먹거리며 기고만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말엽에 그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은 1931년 1월 뮌헨에서 개최되었고 회사의 설립에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에 관한 많은 증언이 있었다. 어느 함부르크의 공장주는 법정에 핀 머리만한 금조각을 제출하고 타우젠트가 만들었고 증언하였으며, 타우젠트의 비서는 타우젠트가 실험을 통하여 분명히 20g의 금을 만드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화학 전문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눈앞에서 실시된 실험에서 타우젠트가 금을 만들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타우젠트가 실험하는 현장을 직접 관찰하였는데 언뜻 보기에 잘 진행되어 실험이 끝났을 때 용해 도가니 속에 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으나, 나중에 타우젠트가 가지고 있던 금촉의 만년필이 생각나서 타우젠트가 실험으로 만든 금을 분석해 보았더니 그것은 만년필의 금촉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합금이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타우젠트는 유죄로 판결되어 3년 8개월의 징역이 선고되었고, 재판의 비용도 지불하도록 명령되어 그의 실험실에 있었던 재료와 함께 남아 있던 약간의 금도 모두 몰수되었다. 재판장은 "이 선고가 큰 사기행위로 막대한 재산을 얻은 사실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이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법정은 비교적 가벼운 벌을 주어도 지장은 없음직했다. 왜냐하면, 금을 잃은 사람들은 손쉬운 방법으로 한 재산을 만들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너무도 쉽게 믿어 버린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가능해진 원소의 변성

원자의 연구가 진전된 결과 일종의 '변성'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타우젠트가 처음으로 설득력을 발휘하여 많은 유명 인사들을 속여먹기 시작한 1925년보다도 훨씬 전에 과학자들은 원자는 분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있었다.

1896년 방사능이 발견된 뒤로 몇몇 원소의 원자는 자연의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20년까지 러더퍼드(Enerst Rutherford:1871-1937)는 자연에서 얻은 입자로 원자를 타격하여 파괴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타우젠트가 징역형을 치르는 동안 콕크로프트(John Douglas Cockcroft: 1897-1967)와 월턴(Enerst Thomas Sinton Walton:1903-?)이라는 두 명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과학자가 1932년에 실험실 안에서 인공적으로 가속한 입자를 이용하여 원자를 분할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본질과 성질을 신중히 연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수많은 원소의 원자를 분할할 수 있게 되어 원소의 '변성'은 거의 식은 죽 먹기처럼 흔한 일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연금술사의 목표-비금속을 실용적인 규모에서 금으로 변성한다는 일을 달성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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